[木食멘토링①] 言路, 기자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木食멘토링①] 言路, 기자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 박완규
  • 승인 2017.09.01 0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언- 木食, 나의 기자의 길

 

예의銳意 신문은 질문이요 명기자는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지금도 신문기자의 신조로 삼고 있다.

아주 긴 것은 언제나 직선이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기자로서 경향신문에 첫발을 디디며 이것이 나의 입사정신이었다.

 

신문을 의문의 눈으로 보자. 전례를 무시하라. 기사 하나하나를 전례가 없는 것처럼 취급하라.

다른 신문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신문을 만들자, 자기 자신 외는 아무와도 경쟁하지 말자, 다른 신문과 경쟁하지 않고 우리 신문 자체와 싸우자, 다른 신문을 기준으로 삼지 말자, 다른 신문이 독자가 아니라 독자가 독자다. 다른 신문의 눈치를 안 볼 때 다른 신문과 다른 신문이 된다.

세상은 달음질치고 있는데 신문은 걸어가고 있다. 새로운 것이 뉴스다. 새로운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신문, 새로운 것에 가장 앞서가는 신문이 되자. 빡빡하고 답답해서는 안 된다. 신문은 맛도 있고 멋도 있어야 한다. 유익하고 격조 있으면서도 재미가 없어서는 안 된다.

신문은 편지다. 그렇게 궁금한 것이라야 하고 반가운 것이라야 한다. 신문은 싱싱한 생선 같아야 하고 풋풋한 새 풀 냄새가 나야 한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신문이 아니라 양식良識을 전달하는 것이 신문이다.

칭찬할 용기를 가진 것이 신문이라야 한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신문이라야 한다. 새로운 뉴스만 특종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도 특종이다. 정확하라. 특종이 있는 신문보다는 오보가 없는 신문이 권위지다. 이래야 다른 신문과 다른 신문이 된다.

우리나라 신문들은 독립신문이 되어본 적이 없다. 권력, 금력, 광고, 경영주로부터도 독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독립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독자로부터의 독립이다.

편집을 모르는 편집국장은 카메라를 모르는 영화감독과 같다.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은 신문이 아니다. 한군데도 틀리지 않는 신문은 하루도 없다.

신문사에 입사하면 신문제작의 문법부터 배워야 한다. 문법을 알고 나면 문법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신문이 된다.

신문기자는 하루살이다. 하루하루가 일생이다. 하루가 끝나면 새로 시작한다. 하루살이를 대를 이어도 하루살이다. 30년 기자생활을 합산해도 하루다. 나의 신문기자 30년은 어제 하루였다.

신문기자는 시대를 앞장서는 것 같지만 실은 항상 시대에 뒤떨어진다. 그날 그날의 뉴스에 쫓기다 보면 오래 전의 정신적 습관이 그대로 있다. 나는 성장을 멈춘 60년생이다.

나는 신문기자가 아니었으면 근접할 수 없는 인명들을 대면했고 신문기자가 아니었으면 갈 수 없는 지명들을 여행했다. 이것이야말로 신문기자의 특권이요 매력이요 보람이다.

신문기자는 항상 제1선이다. 신문기자로 한 시대를 산다는 것은 맨 앞줄의 특석에서 그 시대를 관극하는 일이다. 특혜의 인생이다.

신문기자가 쓰는 일기는 곧 역사다. 신문기자의 입에는 확성기가 달려있다. 적은 소리도 크게 울린다. 신문기자의 붓끝은 利器 이기도 하지만 흉기일 때도 있다. 신문은 사회의 오물을 씻어낸다. 그러나 신문기자의 더러워진 손은 씻을 물이 없다.

나의 반생은 야근이었다. 내 불면의 밤들의 불빛을 줄줄이 엮으면 은하수가 될 것이다. 신문기자는 퇴근시간이 없다. 나는 늘 출근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근무 중이었다.

그리고 자유, 신문기자는 자유에 至高의 가치를 두는 사람에게 알맞는 직업이다. 신문기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애착이 나를 지금까지 나날이 새롭고 또 날로 새롭게 했다.

신문을 믿지 말라. 이것이 신문과 함께 평생을 살아오면서 득도한 나의 계명이다. 단 한 줄도 오보가 없는 신문은 단 하루도 없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신문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신문이 신용을 회복하자면 양심의 표정이 시류에 따라 변용되지 말아야 하고, 정직이 가장 큰 정의여야 하고, 정확이 속도보다 더 가치 있어야 하고, 대중의 악취미에 영합하지 말아야 하고, 개발연대의 사고방식이 도식으로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신문은 항상 새 물결이다. 신문 제작은 하루하루가 새롭기 때문에 매일이 견습이다. 기자는 신문을 언제까지나 견습기자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견습기자다. 신문은 항상 젊다. 신문이 늙지 않는 한 기자도 늙지 않는다.

‘왜 사냐건 / 웃지요’라는 싯귀처럼 사람들은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저 웃기만 한다. 이백李白이 ‘웃을 뿐 대답은 않고 마음 절로 한가롭다’고 한 것 같은 자적自適의 경지에서가 아니라 왜 사는지를 자신이 몰라서다.

나더러 누가 물어준다면 나는 ‘새로운 것을 위하여,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라고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구호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다. 미를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은 인생을 고쳐 사는 일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차례를 매기지 않는다. 단테의 시 한 구절, 모네의 그림들, 대미학자는 모든 아름다움을 다 욕구하지 않고 있다. 조그만 한 가지 아름다움에도 혼신의 충족감을 느끼는 허심의 탐미였다. 미학은, 큰 미학은 작은 이슬방울의 아름다움 속에서 전우적인 미를 보는 기술의 학문임을 나는 배웠다.

먼 것은 아름답다. 별은 그래서 아름답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자꾸만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은 추억보다 아름답다. 꿈이 추억보다 더 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꿈속에 살아왔던가.

심미적 인생을 살자면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에서 노니는 데 방해가 되는 일체의 세속적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사랑은 하되 결혼해서는 안 되고 취미를 가지되 직업으로 매여서는 안 된다.

미의 향락자이고 싶었지 미를 창조하는 직업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예술이 직업이 되면 탐미는 세속화한다.

나는 인생을 진실하게 살려고 애써왔고 세상을 선량하게 살려고 발버둥쳐왔다. 내 최대의 적은 참되지 않은 것이요, 선하지 않은 것이다.

내게는 모든 가치의 척도는 미다. 얼마나 아름다우냐가 얼마나 가치 있느냐다. 새로운 것은 모두 아름답다. 새로운 것을 위하여,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창조없이 새로운 것 없고 예술은 창조하므로 아름답다. 새로운 것과 아름다운 것은 동속同屬이다.

내가 신문기자가 된 것은 새로운 것을 위해서요 그 새로운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기 위해서다.

정유년, 가을로 가는 길목

 

木食  朴 淸 河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