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食멘토링②] 言路, 기자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木食멘토링②] 言路, 기자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 박완규
  • 승인 2017.09.03 0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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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記者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공익公益의 머슴이요 감시자

언젠가 한 언론비평가가 “도대체 저널리스트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이 물음에 필자는 서슴없이 “관찰자이자, 기록자이며 전달자”라고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 세 개의 낱말이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기자나 작가나 공감의 세계에 사는 건 똑같다. 그러나 기자는 늘 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

저널리스트는 납세자의 편이다. 공익의 감시자다. 기자는 ‘공익(公益)’ 이외의 어떤 주인도 섬겨선 안 된다.

기자는 현실의 목격자이며, 증언자다. 관찰자로서의 기자는 지난 날과 오늘을 통해 내일을 예측한다.

기자는 역사의 해석자이자 기록자다. 기자는 역사의 초침적 기록계원이다. 기자는 그냥 대서사가 아니다.

꿈틀거리는 현실의 기록자다. 저널리스트는 ‘위대한 서민’이다.

신문의 가장 큰 임무는 많은 독자 대중에게 ‘알 권리를 위한 판단자료의 제공’에 있다. 이는 비판이나 시시비비 이전의 보다 중요한 문제다. ‘판단자료’의 제공이 소홀히 된다는 건 모든 바탕이 깡그리 흩어진다는 뜻이다.

기자는 늘 양식인의 선을 지켜야 한다. 정보의 전달, 전달 제일주의는 기자의 가장 무거운 책임의 한다.

현대는 자료전쟁의 시대다. 구체적 계수와 사실을 바탕 한 분석만이 예방의 구실을 한다.

활력 즉, 박력과 끈기는 곧 기자직을 이겨내는 원동력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의사보다도 중요하고, 변호사보다도 의심할 여지없이 중요하다. 언론은 공기(空器)이다. 그러므로 매스컴은 사회공중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런 일은 결코 해로울 게 없다.”

영국 어떤 평론가의 말이다.

매스컴의 공익성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기자의 머리에서 ‘공익’의 두 글자를 빼면 그건 한낱 행정대서사나 다름없을 거다. 참다운 기자는 ‘공익’ 이외의 딴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기자는 ‘공익의 머슴’이다. ‘공익의 감시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자는 ‘반(反)공익의 고발자’이기도 하다. 희대의 4000억 비자금 부정축재 사건도 필자를 비롯한 몇 명의 기자가 파헤친 것이다. 이로 인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영어의 몸이 됐다.

외국 전례가 있다. 미국에서는 유수 언론이 파헤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났고, 부정축재를 샅샅이 폭로한 일개 잡지 때문에 일본의 다나까 수상이 권자에서 내려온 뒤 이어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수감됐다.

몇몇 신문기자의 힘, 일개 잡지의 힘이 어떻다는 걸 실감있게 보여준 일 들이다.

어느 경우에도 기자는 권력의 시녀일 수는 없다. 또 언론과 정부는 적대관계를 형성해서도 안된다. 서로 견제하면서 조화를 찾아야 한다. H.G 웰즈는 말했다. “로마제국이 망한 건 언론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기자는 ‘예스맨’이 아니다.

기자는 납세자의 편에 서야 한다. 국고금이 올바르게 쓰여지는가를 지켜 보아야 한다.

‘공익’가운데 보다 우리들에게 절실한 건 ‘빈부의 격차’문제다. 소득의 공평분배를 통해 빈부의 격차를 되도록 좁히는 데 있다. 적어도 생각하는 기자라면, 이런 문제에 예리한 눈초리를 보내야 한다.

 

#현장대학, 서민의 교수

대학을 나온 기자들은 사실 많은 출입처를 드나들며, 계속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기자들에게 있어서 출입처는 곧 현장대학이나 다름없다.

한눈 팔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출입처에서 다루게 되는 전문지식을 배울 수 있다. 이를테면 자기만 똑똑하고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기자의 직업수준과 재교육’세미나에서는 전문기자의 문제가 나왔었다. 기자의 전문훈련 이야기가 나오면 리스톤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신문기자의 자격에 있어, 교육적 바탕과 전문훈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해 왔다. ‘뉴욕타임즈’의 워싱턴 지국엔 대학에서 여러 가지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고 혹은 군대복무 및 그 밖의 사정으로 고등교육을 미처 마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어느 쪽도 모두 다 일을 잘 하고 있다. 그들의 실적을 살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자질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건 바로 활력이다. 박력∙생기∙정력을 말한다. 따라서 내가 믿기엔 훌륭한 기자를 만드는데 가장 으뜸은 학력이나 특수분야에 대한 전문훈련일지라도 그가 그의 직업과 싸워나갈 필수불가결한 ‘활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본다.’

함축성 짙은 레스톤의 이 말은 여러 모로 되씹을 만하다. 기자들이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할까 하는 문제는 잘라서 말하기 어렵다. 어느 경우건 공부에는 끝이 없으니까. 보편적으로 제대로 대학을 나온 뒤, 꾸준히 공부를 계속하면 족하겠다.

아마도 뛰면서 공부하는 것이 기자의 현장대학이 아닐까. 세미나에서 어떤 토론자는 ‘기자가 공부한다는 건 무슨 박사가 되는 건 아닐 것 같다’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말도 매우 함축성이 배어 있다.

어떤 종교가는 기자를 ‘서민의 교수’라고 말했다. 매우 함축성 있는 말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신문적 동물인 것도 사실이다. 신문은 사회와 시대의 호흡에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트리뷴(tribune)은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평민에 의해 뽑힌 로마시대의 호민관을 말한다. 이 말만큼, 신문의 자세를 제대로 표현한 말은 드물 것 같다.

신문기자는 그날의 교사이다. 잡지기자는 그 달의 교사이다. 기자는 개혁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개혁자에게 필요한 자격의 하나는 ‘이상’이다.

서민의 교수건, 호민관이건, 그날의 교사이건 기자의 자세는 끝내 평민적이어야 한다. ‘서민으로 살다 서민으로 가련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떠나지 않아야 한다.

서민에게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일 줄 아는 기자가 진짜 기자다.

 

#진실과 사회정의

MIT대학 정치학과 루시안 패 교수는 솔즈베리가 펴낸 책 「새로운 황제들」에 대해 이렇게 서평했다.

“해리슨 솔즈베리는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투여하는 재해석을 삼가고 ‘진리는 오로지 사실에 기초한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에 충실했다.”

'사실의 바탕'이 기자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귀띔해 준다. 세계적 대기자 솔즈베르를 배워야 한다.

기자는 불편부당 하다고들 말한다.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자는 누구의 편인가? 결론은 간단하다. 억울한 사람, 올바른 사람의 편이다. 진실의 편이다.

“기자는 진실을 으뜸으로 삼는다” 월터 리프먼의 말이다.

강자의 압력에 못이겨, 쓸 것을 못쓰면 안된다. 약자라고 해서 무턱대고 도와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억울한 약자, 올바른 약자만을 도와줘야 한다.

편견은 기자에게 금물이다. 편견은 진실을 수렁에 빠지게 한다. 온갖 선입견의 색안경을 말끔히 없애야 한다. 기자는 사랑과 미움을 함께 지는 중간자이다.

어떤 사정을 들여다 볼 때, 양면을 주의 깊게 해야 한다.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사정의 좋은 면과 함께 사정의 달갑지 않은 면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판단은 그 뒤에 내려야 한다.

"먼저 사실을 파악하고, 그 뒤에 마음대로 곡해하라”

기자의 눈이 공정해야 함을 뜻한다. 공익을 떠난 기자. 사회정의감을 떠난 기자는 이미 기자가 아니다. 기자를 미끼로 딴 데, 출세를 바라는 사람, 돈이 그리운 사람은 아예 기자생활에 발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평민으로, 서민으로 만족할 사람만이 기자의 직업을 택해야 한다.

기자는 단순한 정의파여서는 안된다. 깊이 생각하는 정의파여야 한다. 참다운 정의엔 그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정의는 엉성할 수밖에 없다.

관찰에도 깊이가 있듯이, 정의에도 깊이가 있어야 한다.

또 기자는 장사꾼이 아니다. 기자는 정치꾼이 아니다. 기자는 막노동꾼이 아니다. 기자는 이념, 사상의 선동꾼이 아니다. 기자는 생각하는 일꾼, 생각하는 기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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