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前 쿠웨이트한인회장, '태권도장학재단’ 출범
현봉철 前 쿠웨이트한인회장, '태권도장학재단’ 출범
  • 김대규 기자
  • 승인 2019.10.0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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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일을 하자“는 게 모토··· 월남전에 참전하고, 사우디 공사장도 누벼

 

“어제는 전국체전 태권도 경기가 열린 고려대 체육관을 찾았습니다. 제주도 팀이 출전해 경기했는데, 마침 동메달도 땄어요.“

현봉철 전 쿠웨이트한인회장이 10월7일 본지를 찾아 이렇게 밝혔다. 현 회장은 민주평통 행사와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9월 말 한국을 찾았다.

민주평통은 9월30일부터 10월2일까지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해외지역 간부 워크숍을 열었다. 민주평통 18기에 이어 19기에도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을 맡은 현 회장도 이 행사에 참여했으며, 이어 청와대에서 열린 19기 민주평통 출범식에도 함께했다.

이어 10월5일에는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제13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도 참여해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포장을 친수받는 영예도 누렸다.

세계한인의 날은 10월5일이다. 수년 전부터 세계한인회장대회는 이날을 끼고 개최돼 왔다. 올해 세계한인회장대회는 10월2일부터 시작돼 5일 세계한인의날 기념식 개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세계 각지 한인회장 400여명이 참여한 이날 기념식에는 훈포상 대상자 89명 가운데 7명이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친수받았다. 현봉철 회장도 그 가운데 끼는 영예를 안은 것이다.

그는 국민포장 공적과 관련해서는 “그동안의 여러 활동을 참작하지 않았겠느냐”면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세계한인회장대회 중인 세계한인의 날에 수여하는 만큼, 한인회장 때의 일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전국체전 태권도 경기장을 찾은 것은 최근 그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다. 현 회장은 10월16일 제주도에서 태권도장학재단 출범식을 갖는다. 먼저 장학기금 10억원을 출연해 제주도 태권도 꿈나무를 기르고, 태권도 단체들의 통합과 소통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취지다. 관계 인사들이 장학재단 이름을 정하면서 출연자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강권해서 어쩔 수 없이 ‘현봉철태권도장학재단’으로 출범한다면서, 이름을 붙여서 쑥스럽다고 말했다.

태권도와 현 회장의 인연은 무척 길다. 현 회장은 어려서부터 태권도인으로 자랐다. 1965년 태권도에 입문한 그는 1967년 검은띠를 따고 이듬해인 1968년 태권도 신인 전국선수권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면서 실력을 과시했다. 이어 전국체전에 제주도 대표선수로 나가서 동메달을 따는 영예도 안았다.

“당시 제주도는 태권도가 셌어요. 전국체전에 오면 늘 메달을 땄습니다.” 이렇게 소개하는 그에게 태권도는 인생을 이끈 굵은 물줄기였다.

“당시에는 스파르타식 훈련을 했습니다. 학교에 못 가더라도 운동은 해야 했어요. 그 때문에 공부는 늘 뒷전이었어요.” 지금도 태권도계에서 출신도장의 영향이 적지 않지만, 과거에는 훨씬 심했다고 한다. 도장(館)끼리 서로 경쟁하는 시기였다.

“저는 창무관 소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도관 소속 선배가 ‘지도관에 와서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300여명을 가르쳐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이남석 창무관 중앙총관장이 이종우 지도관 총관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습니다. 관적을 그대로 둔 채 가서 지도관에 가서 가르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창무관 소속으로 남으면서 이관하지 않고 지도관에서 가르치도록 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무척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현 회장이 청년 태권도 인재로 얼마나 주목받았는지를 알려주는 일화다.

현 회장은 1968년 경희대 체육과에 특채 입학 예정이었다. 그는 진학을 위해 제주도에서 밭을 판 돈 24만원을 들고 상경을 했다. 당시 한달 하숙비가 4-5천원이었으니 거금이었다. 부친 지인인 재일동포 안재호씨가 비싼 값으로 사준 장학금 성격의 돈이었다.

“제주대 문명길 교수님이 경희대에 추천했습니다. 선수경력과 수상경력이 있어서 진학이 무난했는데, 이 바람에 제가 잠시 판단을 그르쳐서 그해 진학을 못 했습니다.”

현 회장이 지도관에서 사범을 한 것은 그해 대학진학을 포기한 이후였다. 그는 서대문에 있는 학원에 적을 걸어놓고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신촌의 지도관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하루에 6-7시간 태권도를 익혔다고 한다. 하지만 태권도를 열심히 할수록 낮에는 졸릴 따름이었다.

“군입대를 해서는 8사단 직할부대에 배치됐습니다. 운동선수들을 뽑아놓은 부대였습니다. 거기서도 전국 우승자는 드물어서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사역을 면제받으면서 총검술과 도수체조, 태권도만 전문으로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때 월남파병부대에서 태권도 교관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부대 인사계를 통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이병으로 월남파병부대인 백마부대에 합류해 3개월 훈련을 받고는 일병을 달고 전장으로 파견됐다. 당시 월남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태권도교관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그는 백마부대 28연대 포병부대에 배치됐다.

“어느 날 박격포들이 수없이 부대로 떨어졌습니다. 부대의 저녁 하늘을 아름다운 불꽃으로 수놓았습니다. 아마 수백 발이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헬기 한 대가 포격으로 부서진 것 말고는 다행히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습니다.”

현 회장은 그때부터 ‘포탄이 떨어져도 사람이 쉽게 죽지는 않는구나’ 생각하고는 “겁 없이 돌아다녔다”고 회고했다. 자원해서 보급품 수송 차량에 올라 각 부대를 돌고, 나아가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부대에는 미군 지원 없이 15일간을 버틸 수 있는 전투장비와 보급품이 공급됐다고 한다. PLL 물품이었다. M16 부속품 등도 PLL 물품에 속했다고 한다. 이 같은 물품들이 전투중 손망실로 처리돼 귀국하는 병사들과 함께 한국으로 전해져서 우리 군의 전력강화를 도운 사례도 당시로서는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월남에서 2년을 복무하면서 군에서 제대를 하고는 인천체육전문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 학교를 마치면서 현 회장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파리’ 3개(경사)를 달고 부평 경찰전문대에서 태권도 교관을 하는 것과 4년제 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하는 것, 그리고 제주도 선발 대표 농업훈련생으로 미국에 교육을 받으러 가는 선택지였다.

“각도에서 한 명씩 뽑아서 미국에 농업훈련을 받으러 보냈는데, 선이 닿아서 그 선택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미국에 가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1976년이었습니다.”

미국이 한국 일본 대만 등 세계 27개국에서 농민후계자들을 초청해 진행한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에서는 12명, 일본에서 30명, 대만에서 7-8명이 참여한 것으로 현 회장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와 몬트레이에서 원예부문의 농업훈련을 받으면서 현지 미국인의 제안으로 태권도 도장을 개설했다. 당시 그는 이미 결혼했고, 한국에서 태권도 도장도 개설해놓고 있을 때였다.

“시내 대형마켓 앞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기도 했고, 가라데나 쿵푸 도장을 찾아 대련을 갖기도 했습니다. 태권도를 하는 청년으로서 혈기가 있었고, 자신감이 넘쳤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체류 비자가 문제였다. 그는 훈련생 비자이지, 취업비자를 받은 게 아니었다. 미국인과 함께 개설한 도장에서 그는 결국 손을 떼야만 했다. 현 회장은 미국에 남느냐 귀국하느냐의 두 선택지 중에서 귀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미국에 남았으면, 2년후에는 영주권을 받고 정식으로 태권도장을 경영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귀국을 결정했다. 1978년이었다.

귀국해서도 그는 향후 행로를 두고 선택을 할 여지들이 있었다. 현대건설에 들어가 일하느냐, 국정원에 들어가 국가에 봉사하느냐를 두고 그는 고민했다. 국정원 요원에게 요구되는 선서까지 했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현대건설에 입사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현대건설에서 해외견적팀에 배치돼 견적을 담당하다가 곧 사우디 건설현장으로 파견됐다. 사우디에서는 조경 담당 예산을 집행하는 일 등을 하면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많이 수행했다고 한다.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병원에 4-5일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부장 지시도 옳지 않다 싶으면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회사로부터 빠르게 인정을 받았다. 현대건설 중동사업본부에서 모범사원으로 각 현장에 그의 사례가 회람으로 돌 정도였다. 그는 아이디어를 짜내 공사 예산을 대폭 절감시키면서 회사에 큰 이익을 내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건설사와 사우디 정부 당국까지 그가 관할한 공사현장을 견학 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현봉철 회장은 현대건설에 입사하면서 한국에서 오랜 계속해온 태권도 도장 운영을 접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태권도와 관련된 일을 하겠다고 부인과 약속을 했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가 오는 10월 ‘현봉철태권도장학재단’을 출범시키는 것도 그때 다짐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태권도를 하면서 성장했고, 인생의 고비마다 태권도가 길을 이끌어줬다. 사우디 사업현장에서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치기도 했고, 현지 사업소장의 허락을 받아 사우디주재 프랑스대사관에서 태권도 초청교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 같은 태권도 교관으로서의 활동적인 경험이 근무하는 회사에게는 물론 그의 인생에도 플러스로 작용했다. 그는 “한번 생각하고 일을 하라”는 글귀가 인생을 사 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이글을 미국 캘리포니아 요세미티공원에서 봤습니다. 농업훈련생으로 연수를 가서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였습니다.” 이렇게 소개하는 그는 당시 누군가가 한국과 일본, 미국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일은 잘하는데 생각없이 무턱대고 일한다. 일본 사람은 일을 할 때 조금 생각하고 일한다. 미국 사람은 오너한테 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하면서 일한다. 이 얘기가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때 이래 생각하고 일을 하자는 말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일을 하자’는 글귀를 현대건설에 있을 때 사우디의 사업장에 간판에 적어 내놓았다고 설명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적과 계획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로 진출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새겨들을 만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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