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여거사(八餘居士)의 지혜
팔여거사(八餘居士)의 지혜
  • 박완규
  • 승인 2012.09.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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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사재(思齋) 김정국은 기묘사화 때 정계에서 축출당한 뒤, 시골로 들어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는 호를 짓고 은거하며 지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호에 담긴 뜻을 묻자 사재는 이렇게 대답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며,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본다.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향기를 넉넉하게 맞는다네. 한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한참을 생각하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이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다네.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을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고 여기지. 한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행•불행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지 잘 말해주는 이야기다. 누구나 항상 순풍에 돛 단 듯한 인생 항로를 가지는 못한다. 출발점의 환경이 다르기도 하고, 잘 나가다가 태풍을 만나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하기도 한다.

부와 권력을 지니고 살다가도, 그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행•불행은 이런 삶의 환경 변화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부와 권력을 가지더라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을 못 느낀다. 반면에 삶의 환경이 열악하게 바뀌더라도 그 가운데서 넉넉한 줄 알면 행복할 수 있다.

살기가 점점 퍽퍽하고 고달파지는 환경으로 내몰리고 있다. 전보다 못해진 현실에서도 넉넉함을 누릴 줄 아는 '팔여거사'의 지혜는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가을 목식서생(木食書生)이 모두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 선물'이기도 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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