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河칼럼] 한가위 단상
[淸河칼럼] 한가위 단상
  • 박완규
  • 승인 2012.09.30 2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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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추석풍경을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미소가 절로 나온다. 추석 전날이면 송편에 소고기 산적, 명태전, 파전까지 평소 꿈도 꾸지 못할 음식들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어린 우리들을 몸살나게 하곤 했다. 동네 마을 공터에선 어른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기도 하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곤 “으라차차” 기합을 넣는 씨름 대회도 열렸다.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러 시장에 가는 길에 꼭 검정고무신 한켤레나 빨갛고 노란 옷가지를 챙겨 오셨다.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행여 이것들이 달아날까봐 마음 졸여 한밤중에도 몇차례씩 눈을 뜨고 확인하곤 했고 그래도 안심이 안돼 가슴에 품고서야 잠들었다.

그때쯤이면 서울로 돈 벌러 떠난 동네 형이나 누나들이 선물보따리를 한아름씩 들고 신작로 한편의 늙어 가지가 축 늘어진 소나무나 느티나무 밑으로 잇따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어린 우리들에겐 빨간 넥타이에 검은 양복을 입거나 두꺼운 모직으로 만든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형들이나 누나들은 최고였다. 이들로부터 처음 듣는 서울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촌스러운 추억이지만.

한가윗날이 되면 평소 못 먹어본 음식을 양껏 먹어 불룩해진 배를 내밀고 의기양양하게 고샅을 돌아다니곤 했다. 한꺼번에 기름진 음식이 들어가 설사를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한편으론 형편이 어려워 차례상 차리기조차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음식을 장만한 집들이 십시일반으로 전이며 나물이며 보내줬었다.

50세 전후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추석에 대한 회상은 60~70년대 영화의 흑백필름처럼 비가 내리면서도 언제나 수채화처럼 담백하고 정겹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추수가 끝난 뒤 신라 6부의 처녀들이 길쌈을 하는 내기를 하며 음식대접을 한 것이 추석의 유래라고 적혀있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는 한가위 풍속은 가락국에서 시작됐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음식을 빚어 이웃과 함께 나눠먹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돼 있다.

2천여년을 우리와 함께 해오며 언제나 설레던 추석이지만 올해는 여느 해에 비해 쓸쓸하고 힘겹게 느껴진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회다. 때늦은 장마가 남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황금빛으로 물들어야 할 풍요로움을 앗아갔다.

영․호남에 잇따른 세개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에선 앞으로 살아갈 걱정에 명절은 실종돼 버렸다. 정부에서 만들어준 컨테이너 박스에서 그래도 차례를 지내겠다고 음식 몇가지를 올려놓은 수재민의 초라한 모습은 우리를 눈물나게 한다. 모든 것이 망가진 이런 고향을 찾는 이들도 막막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뚜렷한 방책도 없이 짓눌린 가슴으로 고향을 찾느니 차라리 귀향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태풍이 남긴 피해는 또 있다. 추석 온정이 수재민들에게 집중되다 보니 항상 춥기만 하던 고아원과 양로원 등 복지시설들은 더없이 썰렁한 명절을 지내야 했다. 온정의 손길은 간데 없고 시청같은 관공서들만 인사치레로 얼핏 스쳐 지나가고 끝나버렸다.

생각해보면 우리 어릴적 사정은 지금보다 더 나빴고 살기 또한 힘들었다. 그래도 그때는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는 정 같은 것이 살아 있었다. 홀아비 사정 과부가 안다고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미덕도 남았었다.

지금 사정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옛날보다 더 힘들고 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때보다 못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이래저래 귀향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번 한가위를 보내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가슴 한쪽이 가위에 눌린 것처럼 무겁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해진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그만큼 더 따뜻하고 온기 넘치는 세상으로 변하지 않을까. 물질의 풍요도 중요하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와 사랑의 회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가위 눌린 가슴마저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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