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열풍,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①] 정창환 SM엔터테인먼트 이사
[K-POP열풍,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①] 정창환 SM엔터테인먼트 이사
  • 니콜라
  • 승인 2012.07.06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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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열풍,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①] 정창환 SM엔터테인먼트 이사

밴드위주 패턴서 탈피…유머·뮤지컬 패러디 등 관객 허찌르는 반전으로 세계 가요열풍 주도

 
▲ SM엔터테인먼트의 정창환 이사
"K-POP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게 살 길이죠."

올해로 12년째 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로 성장한 SM엔터테인먼트에서 잔뼈가 굵은 정창환 이사(41)의 말이다.

그는 일본을 넘어 아시아로 다시 세계 곳곳에 퍼져나간 K-POP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전세계 어디서나 K-POP을 즐기는 시대를 살며 누구나 이 태평성대가 지속되기를 원하지만 실질적인 방법을 내놓는 이는 드문 이 때, 그에게 답을 물었다.

"앞으로가 중요하죠.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SM은 보아나 동방신기를 해외에서 데뷔시키기 위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가지고 고생을 자처했어요.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결과도 없었겠죠. 양질의 공연과 콘텐츠를 위한 꾸준한 투자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돈벌이를 위한 재미없는 쇼가 나오기 시작하면 금세 바닥을 보일 겁니다."

정 이사의 지난 12년을 돌아보면 K-POP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볼 수 있다. 1998년 연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그가 처음부터 음악 콘텐츠 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현대백화점의 마케팅 업무가 그가 내디딘 첫 사회생활이었다. 3년간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삶의 좌표를 돌연 바꿨다. 사표를 내고 2000년 SM엔터테인먼트 입사원서를 낸 것.

"신화의 로드 매니저부터 시작했어요. 함께 학교 다니던 친구는 방송사 PD로 입사한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죠. 집안 반대요? 음악을 했다면 반대하셨겠지만 음악 분야에서 1등 회사에 들어간다니 별 말씀 없으시더군요."

대학시절 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던 그는 곡을 쓸 정도로 음악에 빠져 살았다. 사회 초년병이었던 그가 잊고 있던 음악으로 돌아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안정적인 사무직에서 불안정한 현장직으로 급격하게 변한 주변 환경마저 수월하게 적응되지는 않았다.

"운전을 하고 심부름을 하면서 내 인생이 어떻게 되나 두려웠던 적도 있었죠. 그래도 음악 쪽 일이어서 흥미가 있었어요. CD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방송 출연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보면서 점점 재미가 붙었죠."

회사가 점차 성장하면서 그가 맡은 일도 늘어났다. 가수의 스케줄을 워드프로세서로 정리하고 음반 제작 과정도 계획에 맞춰 진행하는 시스템을 만들며 업계에 대한 감을 키웠다. 2003년부터 기획과 전략을 세우는 A&R을 담당하면서 그의 눈도 해외 시장으로 향했다. 세계 최대 음악 박람회라는 미뎀(MIDEM)은 그가 해외 음악 동향을 몸으로 체득한 학교였다.

"1970년대 정주영 회장이 건설 수주를 따기 위해 해외로 나갔던 걸 상상하시면 돼요. K-POP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죠. 부스에서 보면 포스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어요. 다가가서 인사하고 사정하고 안되면 다시 이야기하고. 그렇게 데모곡 받아내면서 하나씩 네트워크가 쌓여갔죠."

정창환 이사는 SM 내에서 '공연 통'이다. 2005년부터 국내외 주요 공연의 연출을 맡고 있다. 최근 열린 55만 명을 동원한 동방신기의 일본 투어와 2일간 10만 명을 동원한 슈퍼주니어의 도쿄돔 공연도 그의 손을 거쳤다. 공연은 현지 팬들의 반응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열기를 확인하는 자리다. 전쟁터로 따지면 최전선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불과 5,6년 전만해도 이 최전방을 해외 연출가에게 맡겼던 것이 국내 음악계의 현실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우고 홀로 독학하며 격차를 따라잡고 그들의 인정을 받아낸 것은 그가 벌인 또 다른 전쟁이었다.

"현대시절 이벤트를 진행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초반에는 플라이투더스카이 팬미팅이나 강타 문희준의 국내 공연을 맡아서 하게 됐죠.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일본 공연 관계자들의 자존심이 대단했어요. 한국에서 감히 공연 연출을 할 수 있겠냐는 반응이었죠. 노래 사이 몇 초를 둬야 하는 기초적인 것부터 연구하고 배우기 시작했어요."

물론 서러웠던 시절이었다. 한수 배워야 했다. 일본 공연 시장의 장점을 배우면서 차별화를 고민했다. 시장 장터의 소리꾼이 행인을 불러 모으는 걸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과정을 거쳐 경험을 쌓였고 노하우는 생성됐다. 이제 SM만의 공연 노하우를 일본 스태프가 인정하고 배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슈퍼주니어의 '슈퍼쇼'에는 여장을 하거나 '사운드 오브 뮤직'을 패러디 하는 모습도 있죠.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에요. 밴드 위주로 정형화된 패턴에 익숙하기 때문이죠. 웃고 울리는 장치가 정교하게 맞물리면서 관객의 허를 찌르고 반전을 주죠. 이런 공연은 국내에서 특화됐고 이제 일본에서 배우려고 해요."

요요기 경기장에서 있었던 보아의 첫 일본 투어와 동방신기의 첫 해외 투어였던 태국 공연, 장대비로 취소될 뻔했던 SM타운의 베이징공연 여기에 슈퍼주니어의 파리 단독 콘서트까지 그가 떠올리는 순간들은 이제 K-POP의 역사가 됐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일에 빠져들어 성과를 올리며 그는 국위선양이라는 단어를 깨닫게 됐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를 반하게 한 SM의 힘은 무얼까? 그의 답은 한류의 영속성에 내놓은 세 글자 답변 즉, '정공법'과 궤를 같이 했다.

"가장 큰 힘은 음악이죠. 퍼포먼스를 중요시 하니까 그것들이 잘 보여질 수 있는 좋은 노래를 고르는 안목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어요. 꼼수 부리지 않고 홍보에 의존하지 않고 좋은 곡을 멋있는 스타가 부르게 하는 노하우가 SM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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