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古宅❷]달과 강, 술과 詩가 있는 절경 농암종택
[한국의古宅❷]달과 강, 술과 詩가 있는 절경 농암종택
  • 임정섭
  • 승인 2012.07.07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의古宅❷]달과 강, 술과 詩가 있는 절경 농암종택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농암 이현보의‘농암가’-

 
전통은 기억의 다른 이름이며, 따라서 붙들면 보존되고 놓으면 사라진다. 우리에게 전통이 소중한 까닭은 무엇보다 그 기억에 기대어 꿈을 꾸고 지혜와 조언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소외와 망각의 시대에 별 볼일 없는 피로한 삶을 살수록 행복한 삶에 대한 물음은 절박해지고 우리는 그 답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한다. 그 길 위에 농암종택이 있다.

농암종택은 농암 이현보 선생(1467-1555)이 태어나 성장하여 생을 마감한 집이다. 고려 말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이헌은 도산 산수의 수려함을 사랑하여 배산임수와 끝없이 펼쳐진 문전옥답의 터전에 집을 앉히고 영천 이씨 입향시조가 되었다.

농암 선생이 집 앞에 흐르는 강을 분강(汾江)이라 하여 이 마을은 분강촌 혹은 부내마을로 불려왔다.

부내마을이 깃든 도산 진경을 두고, 모재 김안국은 "도원경에 들어온 듯하다"고 했고 농암 선생은 "정승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자연을 몹시 사랑했던 농암 선생은 늘 고향에서 살고자 했으나 아직 부모님이 계시어 그럴 수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것이 곧 효도였던 탓에 벼슬을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부내 강기슭에 정자를 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는 고운 이름을 붙였다. 부모가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여 부모에게 남아 있는 하루하루를 아끼고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선생은 일흔의 나이에도
구십이 넘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잔치자리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성리학적 윤리예절의 모든 것은 '효'라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선비 집안 이 라 면 조상에 대한 효를 실천하기위해 반드시 사당을 마련하고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모셨다. 하지만 살아계신부모에게
효를 실행하기위해 정자를 짓는 경우는 드물었다.
안동 부사 시절, 선생은 여든 살이 넘는 안동고을 어른수백 명을 남녀 귀천 없이 모두 초대해서 경로잔치를 베풀었고, 고을 원님의 신분임에도 부모를 위해 때때옷을 입었다. 이렇듯 선생은 효를 통해 부모를 섬겼을 뿐아니라 반상구별 없는 애민 정치를 실현했다.

농암 선생이 막힘이나 걸림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에 오른 것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귀거래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때였다. 명예나 이익에 뜻이 없었던 선생은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나 강호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향해 자신을 완벽하게 열어놓았다.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달빛 그림자가 드리운 강가를 거닐면서 혹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어부가>, <농암가> 같은 아름다운 시가를 지어 노래했다. 이처럼 시와 인간이 일치하는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선생은 완전한 자유인이자 풍류객의 삶을 살았다.

모슬렘들이 일생에 한번 메카를 순례하듯, 문인과 지식인들이 다투어 청량산을 산행하고 그 곁에 흐르는 강변을 순례하며 글을 쓰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이곳은 주세붕을 비롯하여 이황, 이익 등 어질고 지혜로운 선비들을 불러들여 80편이 넘는 기행문과 1천 편이 넘는 시를 남기면서 영남가단의 탯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청량산 부내마을에 안겨있던 농암종택은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30여 년 남짓 잊혀졌다.

오늘 농암 선생을 기억하며 가송리 올미재로 옮겨진 농암종택을 찾아간다. 이곳은 도산구곡 가운데 제8곡으로 꿈결 같은 절경이 펼쳐져 있다. 강은 용트림하듯 흘러나가고 산은 우뚝 몸을 일으켜 병풍 같은
석벽이 되어 발을 물에 담근 채 굽이치고 휘어진 강줄기를 따라간다. 모퉁이를 돌면행여 뒤에 두고 온 강산을 잃을까 강물은 잠시 여울지고 유순한 봉우리들도 따라 멈칫거린다. 그 길 끝에 농암종택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올미재 산속에 농암종택을 되살려놓은 이는 농암 선생의 17대 종손 이성원 선생이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선생은 먼 곳에서 찾아온 이들을 맞았으나 말을 아꼈다. <농암종택 종손으로서 삶>을 결정하여
귀거래하기까지 젊은 날 간단없는 갈등과 고뇌를 겪어야 했던 삶을 말에 담아 굳이 드러내놓는 일이 부질없다 여겨서일지 모르겠다.

사실은 선생을 둘러싼 모든 것이 선생을 대신해 말하고 있었다. 뒷산과 앞산에서 들려오는 유월의 뻐꾸기 소리, 강가 미루나무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손짓하는 모습, 형용할 수 없이 시원하고 부드럽게 살갗을
어루만지는 바람, 대청마루 벽에 붙은, 아이 키만 한 <積善>이라는 글씨, 주황빛이도는 새콤한 안동 식혜...
그럼에도 말귀 못 알아듣는 아이처럼 선생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야 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명예를 버리면 된다고 했다. 또 호주머니 속 송곳처럼 좋은 것은 숨길 수 없다고도 했다. 선생 자신이 격심한
방황을 거치며 에돌아 살아왔던 탓일까. 지난해 아들이 관례를 올렸는데, 그 아이도 스스로 좋다면 종손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겠느냐고 했다.

선생은 여전히 <큰집(宗宅)>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올미재의 농암종택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기로 결단하면서 품었던 의문이었다. 선생이 농암 선생과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도산구곡에 펼쳐놓았던 선현들
의 학문과 삶을 추체험하고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도 그 고뇌의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선생은 책에서 도산 길은 우리 모두의 사색 공간 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훌륭한
인물이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인데, 종택은 그런 훌륭한 사람을 모시고 그렇게 되기 위해 실천하는 집이라고. 농암종택은 바로 이러한 선생의 생각을 그대로 건물로 구현시킨 집이다.

양쪽에 날개처럼 행랑채를 거느린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저 멀리 학소대를 배경으로 단아한 긍구당(肯構堂)이 앉아 있다.

650여 년 전에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으로 세운 농암종택에서 가장 오래되고 귀한 집이다. 농암 선생이 44세 때 벽에 귀거래 그림과 시를 붙이고 귀거래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지은 명농당(明農堂), 부모에게 효를 실천하기 위해 강기슭 농암바위 위에 앉혔던 애일당,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문학과 풍류로 풀어냈던, 강변 바위 위에 선 강각(江閣). 봉제사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당과 접빈객을 통해 적선을 실천하는 사랑채...

농암종택에 잠시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삶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읽어내고 종택을 둘러싼 자연이 선물처럼 주는 지극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