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권자가 아닌 사초자(史草者)
편집권자가 아닌 사초자(史草者)
  • 박완규
  • 승인 2012.07.08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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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유명한 문장중에 ‘사람들은 나쁜 일을 당하면 대리석에 새겨두고, 좋은 일을 당하면 먼지에 써둔다' 라는 격언이 있다.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이며 사악한 특징 중 하나인 것, 마치 원죄의 성혼이라도 되는 양 우리 내면에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매일 신문이나 텔레비전 같은 매스컴을 통해 그것을 본다. 주의깊게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보고 모든 단어를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라. 찬사의 말, 감탄, 칭찬하는 형용사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말이나 글은 그나마 예술 분야에서 조금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도 항상 똑같은 사람들, 거의 신성시되는 몇몇 작가들에게만 주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 아주 좁은 분야를 벗어나면 제목으로 뽑히고 뉴스거리가 되는 것은 비판, 비난, 비방 뿐이다.

예컨대 모든 언론의 기사들은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며 비난한다. 비난당하거나 탄핵받는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말도,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과거에 그가 훌륭하게 해냈던 일이 있어도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나치에 대항해 자기 나라와 전유럽을 승리로 이끈 처칠에게도 그랬고, 내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드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베트남의 비극을 해결한 닉슨의 공적을 절대, 단 한순간도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인정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심판의 날에 천칭 저울을 사용할 것이라고들 한다. 한쪽 접시에는 공적들을 올려놓고, 반대쪽 접시에는 모든 인간의 죄를 올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저울은 고장이 나서,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 먼지 한톨만 올려놓아도 영원히 악의 편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시계 2012년 상반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지나온 6개월을 반추하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몇 년 동안 한 상점을 드나들었고, 그 상점에서는 물건을 집까지 배달도 해주면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잘해 주었다.

우리는 그 상점에 들러 허물없이 수다도 떨었다. 그런데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건, 계산서의 계산이 잘못되었다거나 오해를 했다거나 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고집을 부리다가 문을 쾅 닫고 거기서 나와버린다. 화가 난 우리는 상점을 바꿔버리고 지금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이런 일은 그 관계가 표면적이기 때문에, 거래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것일까? 상점에 가서 서비스가 좋으면 물건을 살 뿐이지 가게 사람과 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는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몇 년 동안 계속 사귀어온 친한 친구의 경우에도 똑같이 냉혹하게 반응한다. 때로는 무례한 언동, 몰이해, 망각, 또는 남편이나 아내와 접촉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회복할 수 없는 관계 단철로 이어지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렇게 과거는 지워지고 황폐해진다.

그러면 연인끼리 싸울 때, 이혼할 때는 어떻게 될까? 그 둘이 함께 맞았던 모든 좋은 일, 함께 나누었던 기쁨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기억은 끝없는 건망증으로 삶의 절반을 꿀떡 삼켜버리는 심연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잘못만을 기억한다. 그것을 과장하고 잊지 않고 대리석에 새긴다. 긍정적인 부분을 원상태로 되돌리고 아직도 살아 있는 기억의 잔해에서 그것을 뽑아내는 일은 아주 힘들다.

그러려고 해보면 기억 속에서 잘못된 행동들과 증오에 찬 말들이 와르르 달려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이 기억의 횡포, 이 사악한 정신의 메커니즘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자문하게 된다.

한때 도덕 신학은 그것을 잘 인식했다. 그것은 분노이다. 치명적인 악습이 되어버린 분노이며 용서와 완전 대립되는 것이다. 용서 속에서는 현재의 악의가 과거를 왜곡한다.

그러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공정함은 아무 관련이 없다. 공정함은 알리바이다. 그것은 커다란 우산으로, 그 밑에서 공격성을 이성적으로 왜곡하고 스스로 문화인이 되고 고상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바야흐로 나라 안팎이 새로운 질서로의 급격한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온라인 전문언론도 편집체계를 일신하고 보다 명확한 객관성을 담보하면서 일과성 보도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기록지로의 가치성 높은 뉴트렌드를 표방해야할 시점이다.

지구촌 무도 태권도인의 소통과 나눔을 표방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GTN-TV의 편집인이자 주필로서 다시금 서슬퍼런 기자정신으로 무장하되 현재의 악의가 과거를 왜곡하지 않도록 사초(史草)를 쓰는 심정으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글을 담아낼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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