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자,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질 때까지
떠들자,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질 때까지
  • 니콜라
  • 승인 2012.07.0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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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자,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질 때까지

▲ 김미수 소설가
지난주 중부전선 최전방 철책을 걸었다.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통일문학포럼에서 마련해 준 자리였다. 철책을 걷는 동안 동행한 작가들은 계속 탄식했다. 이건 너무하잖아, 고작 얇은 철사 줄에 가로막힌 60년 역사에 대한 울분 같았다.

전쟁과 분단, 냉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철책 너머 비무장지대는 불안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정전협정에 따라 임진강변에서 동해안까지 248㎞에 걸쳐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남북 철책 사이의 4㎞ 폭을 계산하면 비무장지대는 총 992㎢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비무장지대’가 아니었다. 철책선 안으로 일련번호가 매겨져 덮여 있는 클레이모어만 보아도 남북한의 대치상황이 얼마나 긴박한지 알 수 있었다. 클레이모어를 건드리면 700여개의 쇠구슬이 전방 50m로 날아올라서 1개 소대를 격파한다고 한다. 그런 클레이모어가 몇 백m 거리마다 발견되었다.

또한 비무장지대 및 민통선 이북에 104만발의 지뢰가 깔려 있다고 한다. 지뢰 매설지역의 총면적이 91㎢나 되며 그 가운데 69㎢가 미확인 지뢰지대라고 한다.

철책을 걷는 동안 이 부근에서 근무했다는 원로작가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남북한군은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를 감시하고 마치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아군처럼 한몸으로 움직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로 장난기가 발동하면 술래잡기를 하듯 힘겨루기를 하다가 악수나 하자고 손을 내민다. 그 손에 잡혀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그대로 월북, 월남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서로 밀고 밀치는 장난만 하고 말았단다. 정적에 싸인 팽팽한 긴장감을 못 이겨서 서로의 처지까지 망각한 채 그런 시간을 보낸 것이다.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남북이 함께 옹달샘 물을 퍼다 마신 적이 있다. 샘터에서 만나면 서로 말을 텄다고 한다. 밥은 먹었나? 물으면 이밥에 고기 배 터지게 먹었다, 그러다가 서로 옥신각신 비방과 욕설이 이어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시계도 건네고 만년필도 주고받기도 했단다.

북한군이 돼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돼지 잡아먹는 날이라는 것을 과시하던 날의 이야기도 들었다. 북한군은 과시효과를 부풀리기 위해 돼지를 마구 두들겨 패서 더 크게 꿀꿀거리게 만든다. 남한군은 그에 질세라 일제히 손목시계를 차고 국군도수체조를 했단다. 결과적으로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남북한 군인들 간의 긴장을 일시나마 완화시켜주었을 것이다. 비록 서로 총을 겨누고 있지만 같은 불안을 안고 있는 처지의 청년이라는 것을 소통을 통해 이해했을 것이다.

후방의 우리들은 철책 너머의 위험한 지뢰밭에 젊은 군인들을 60년 동안이나 쉬지 않고 투입시키면서도 까마득히 그들의 존재조차 잊고 지내왔다는 사실을 철책을 걷는 동안 상기했다. 철책을 걷고 난 뒤 돌아가면 떠들리라. 비무장지대에 대해, 그곳의 군인들의 위험한 행군에 대해. 누구도 떠들지 않으면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모를 일이 아닌가.

GOP 철책을 걷기 전, 작년 한 해 동안 북한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탐사했다. 압록강 2000리를 달리면서 북한의 뙈기밭과 건물에 적힌 붉은 글씨의 구호도 보았다. 며칠을 달려도 불빛이 없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두만강 1400리를 달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정적의 강이었다. 그때도 나는 생각했다. 떠들어야만 한다. 본 것과 아는 것과 알아야 할 것에 대해.

얼마 전 우리 사회는 탈북자가 북송당하는 문제로 떠들썩했다. 탈북자의 처지를 알면서도 난민을 돌려보낸 중국 때문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탈북자 문제는 조용한 외교로 풀어야만 탈북자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의 편을 들기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있다. 탈북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비로소 탈북자는 우리 사회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북송당하는 탈북자에 대해 침묵하는 동안에는 탈북자는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정적에 싸인 은폐된 평화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정적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이 있거나 더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보이는 현실 이면에 보아야만 하는 현실의 문제를 찾아내서 떠들어야만 한다. 누구라도 좋다. 사라져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떠드는 자가 늘어날수록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다소 시끄럽더라도 문제를 공론화의 장으로 이끌어낸다면 정적에 싸인 망령을 쫓아낼 방법이 나올 것이다. 자, 이제 떠들자. 그것이 해결의 실마리다. 그것이 소통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사라져야만 하는 것들을 사라지게 할 힘을 얻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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