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㉕>혜은 큰스님과의 만남
<좋은아침㉕>혜은 큰스님과의 만남
  • 최영진
  • 승인 2012.07.3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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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아침㉕>혜은 큰스님과의 만남

 
복중의 폭염이 온 누리를 달구는 7월 말엽 주말을 틈타 청도 운문사를 찾았다.

운문사에는 우리나라에 두 그루밖에 없다는 '처진 소나무'가 우아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다. 소나무들이 제 각기 특징이 있어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대상인데 우산처럼 대지를 뒤덮으며 가지들이 아래로 처진 소나무는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

이름나기로는 법주사 입구에 서 있는 '정이품송'이 있고 영월 장릉 인근 산의 소나무들이 모두 장릉을 향하여 읍을 하고 있는 모습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지만 운문사 '처진 소나무'는 100평이 넘는 대지를 가릴 만큼 크면서도 거칠지 않고 고운 모습이 ‘하나 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를 노래 부르는 것처럼 보고 또 보고 뒤돌아보게 만든다.

경내에는 운문승가대학이 있어 250명의 스님들이 공부하는 비구니 대찰이다. 이 절의 주지가 혜은(慧隱) 스님이다. 내 누님께서 열흘 전쯤 선통하여 종무소 넓은 응접실에서 뵈었다.

성철 큰스님을 뵈려면 어느 누구라도 3000배를 한 연후에 만났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오지만 혜은스님은 이 더위에 멀리 온 손님이 행여 지칠까봐 염려해서인지 큰 절 한번으로 탕감해 주셨다.

혜은 스님을 만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게 하수상하고 생각이 어수선하여 가슴이 바윗돌에라도 늘린 듯 무겁기만 하기에 하루만이라도 깊은 산사에 들어가 있어야 되겠다고 나선 길에 '사리암'을 관장하는 운문사에 들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누님이 다녀간 때문인지 아예 작심하고 나오신 모양이다. 사방으로 열린 창문에서 여름 한낮이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 스님은 나중에 가사장삼 겉옷까지 벗으면서 말씀에 열중이다.

무려 두 시간에 걸쳐 개천에 흐르는 물처럼 잔잔하게 말씀하는데 설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면서 듣는 이의 맘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

불교의 요체는 기복사상이 아닌데도 모두 거기에만 매달려 있으니 버릴 수도 없게 되었다는 말씀 끝에 "복을 빌기 전에 자신부터 참회하는 것이 진정으로 복 받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오히려 객을 떠본다.

측간에 들면 몸 속의 노폐물을 모두 버리는데 선방에 들면 마음속의 더러움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잊지 않는다. 스님은 이미 89년도에 장암을 얻어 서울대병원에서 대수술을 받고 항암치료 중 어차피 한번은 가는 인생이라는 깨달음이 들어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절로 들어왔단다.

이 때부터 탐진치 3독을 버리기로 작정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십수년에 걸쳐 사리암 불사를 이뤄냈던 의지로 하나 하나 버리기 시작하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고 몇 해 전에 병이 재발했지만 예전의 암 종양이 전이 확산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암종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 뒤 일체의 투약도 하지 않고 다른 스님과 똑같이 절 음식을 먹는데도 통증도 없고 아무 탈이 없는 걸로 볼 때 탐진치만 버린 게 아니라 몹쓸 놈의 암 덩어리도 함께 버려진 모양이라고 웃는다.

지난 80년 5공 치하에서 내란음모사건에 연루하여 감옥에 유폐되어 있을 때 큰 형님께서 간암에 걸려 몇 달 견디지 못하고 불혹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쓰라린 체험을 했던 바 혜은 스님의 놀라운 투병과 기적같은 회복에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스님의 속세 나이가 금년 67세인데 62세 되던 해에 제자스님 한 분이 사리암에서 '나반존자' 앞에 1배를 올릴 때마다 혜은 스님의 생명을 하루씩 연장해 달라고 지성으로 기도했는데 70세까지 허가를 받았다고 하니 앞으로 3년은 끄떡없을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웃는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 티없이 맑을 수 있단 말인가.

절 문을 나서면서 문득 무소유(無所有)라는 말이 떠오른다. 욕심을 비워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뜻으로 흔히들 쓰고 있으나 불가에서는 무소유의 의미를 아무 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익만을 탐하지 말고 그 이익을 가져다주는 전체의 인연을 보며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이고 활용하여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참된 이익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역설적으로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온 세상을 다 갖게 된다는 뜻이리라.

혜은 스님은 무소유와 버림의 진리를 몸소 실천할 수 있기에 진정한 부처님의 길을 추구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스님의 법명이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혜은(慧隱)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가진 자 쥔 자들이여, 버리고 버려라. 옴 하로다야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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