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아침㊸>죽음에 대한 단상
<좋은아침㊸>죽음에 대한 단상
  • 최영진
  • 승인 2012.08.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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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아침㊸>죽음에 대한 단상

 
죽음을 놓고 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죽음은 위대하다 / 우리는 웃고 있는 / 그의 입이다 / 우리가 생명의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 / 죽음은 우리의 복판에서….」 릴케의 「에필로그」다. 그는 죽음을 삶의 중심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너는 어디로 갔느냐 /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 형님! /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 다만 여기는 / 열매가 떨어지면 / 툭 하는 소리가….」 목월은 「하관」에서 현세를 초월한 영역이 곧 죽음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을 의미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처럼 자기 파괴의 욕망이나 희생의 형식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한 시기의 끝이었다.

이와는 달리 삶이 죽음과 밀착되어 있다면 죽음 역시 정신적 물질적 소생에 걸쳐 모든 삶의 근원이 된다. 새턴에 의해 잘린 나무가 재생의 신비함을 지닌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죽음은 그렇게 긍정 또는 부정적이지만 그것에 관한 알레고리와 이미지는 여명의 신비한 빛과 같은 한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죽음을 그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흐르고 성장하는 모든 것은 초기의 종교 때부터 생명이었다. 불의 경우는 활력이기 때문에, 물은 비옥이고, 식물은 녹색의 푸르름을 지녔기에 그러했다.

많은 민담과 전설속에서 생명과 재생의 기원은 동굴이었다.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소생의 샘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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