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와 해명의 천추(天秋)려니,,,
회오와 해명의 천추(天秋)려니,,,
  • 박완규
  • 승인 2012.09.27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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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취재차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본 남미의 하늘은 이글거리는 태양을 안고 있으면서도 유별나게 푸르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코리엔테스 대로(大路)에서 보는 하늘은 남미 가운데서도 유독 더 푸르게 느껴졌다.

허공을 찌른 오벨리스크의 새하얀 색깔이 쪽빛 하늘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일까. 신대륙에서 유러피언을 연출한 아르헨티나의 기상처럼 보이는 하늘이었다. 그러기에 여행자의 발길을 잡고, 잠시 사념에 빠지게 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은 원색적인 남미의 그것과는 다르다. 멈추지 않는 비원이 담긴 듯, 푸르면서도 투명한 게 우리의 가을하늘이다. 또한 무한대의 그윽한 깊이는 신(神)의 얼굴을 감춘 듯 신비하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견딜 수 없이 설레게 한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은, 어쩌면 그같은 초월적 관념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흠을 잡자면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삶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의 벽을 인간으로 하여금 실감케 하고, 절망을 안겨 주는 것이다. 그만큼 영적인 하늘이다.

어디에서 바라보건 하늘은 영원하며 신성한 세계의 이미지다.「…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한용운(韓龍雲)의 시(詩)〈알 수 없어요〉의 한 토막이다. 윤동주(尹東柱)는〈소년〉에서「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고 썼고, 라르센은「하늘은 아마도 이 세상에 대한 신의 감정이리라」고 했다.

한용운의 하늘은 절대의 얼굴로, 윤동주의 하늘은 우물이나 강물과 등가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자아 반성의 뜻으로 다가온다. 또 라르센의 하늘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공간으로 비춰진다. 임진년 흑룡의 계절이 등성이를 넘어 재촉하듯 잿길을 내려오고 있다.

인생의 가을에 서 있어서가 아니다. 낮선 폐쇄와 부패의 늪에 혈혈단신 뛰어들어 불편부당(不偏不黨)으로 계도와 계몽을 선도했건만 불통의 단절과 과거로의 회귀, 굴욕의 고난이 있었을 뿐, 광영은 커녕 보람조차 간데 없었던 내가 몸담았던 세계에 회오를 던지게 된다.

어쩌랴. 그르쳤음의 해명을 스스로 깊은 하늘에서 구하는 것도 좋을 성싶은 가을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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